본문 바로가기
오락과 여흥/영화

테넷(TENET), 이것만은 이해하고...

by star dust 2021. 1. 25.

테넷, 이해하지 마라?

 

테넷(TENET),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아마도 테넷 영화에 대한 리뷰들에서 가장 많이 접하는 말인 듯하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우선 영화에서 여자 연구원 바버라(클레망스 포에지)가 얘기한 그 대사는, 이해를 포기하라는 말은 아니었다. 단지 기저에 있는 물리학적 이론이 너무 어려워, 느낌만으로도 현장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얘기일 뿐이었다.

클레망스 포에지 설명

 

한데, 이 말을 인용해 아예 이해를 포기하라는 말처럼 해석하는 것은 좀 그렇다고 본다. 그리고 아예 이해가 안 되는데 뭘 좀 느낄 수 있을까? 바둑이 뭔지, 기초적인 규칙도 모르는 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을 즐길 수 있을까? 한 수 한 수의 의미와 깊이는 몰라도, 기초적인 규칙과, 승부를 내는 방법은 알아야 최소한이라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테넷을 제대로 즐기기 위한 최소한의 이해를 도와보려 한다.

테넷 포스터 캣

 

테넷, 사실은 쉬운 영화?

 

테넷을 즐기기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은 우선 겁먹지 말고 만만하게 보는 것이다. 어차피 어려워봐야 영화일 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또한 실제로 영화의 결론 자체는 아주 단순해서, 흔한 타임 패러독스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아래 단락에는 약간의 스포가 있다. 그냥 바로 봐도 잘 이해될 것 같은 사람은 건너뛰고, 그 아래 ‘엔트로피와 시간’ 단락으로 넘어가시라.

 

영화 테넷의 줄거리를 최대한 단순하게 요약하지만, 결국 미래로부터의 위협에 처한 현재 세계를 주인공과 조력자들이 구하는데, 주인공을 돕는 모든 것들을 준비한 사람이 사실은 미래의 자신이었다는 얘기다. 어떤가? 쉽지 않은가?

 

 

다만 테넷이 기존 영화들과 다른 점은, 이 과정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복잡 정교하게 꼬아놨는데, 그 꼬임의 원리가 난이도 극상의 현대 과학 이론, 즉 우주론, 시공간, 엔트로피 등이라는 점이다. 물리학 박사 학위 코스처럼은 아니더라도, 일반인 수준에서라도 어느 정도는 이 부분을 이해해야 영화를 (조금이라도) 편히 즐길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얘기하지만, 일반인 수준에서 말이다.

수학식들

 

엔트로피와 시간

 

엔트로피란 무질서한 정도를 의미하며, 엔트로피 법칙이란 우리 우주의 엔트로피(무질서도)는 항상 증가한다는 것이다. 비록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현대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제대로 된 정의는 너무 어렵기에, 일반인이 테넷을 즐기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정의로도 일단은 충분하다.

전쟁터의 대칭

 

그런데 왜 엔트로피는 증가만 하는 걸까? 이유는 우주론과 관련되어 있다. 현대 주류 우주론에 따르면, 애초 우리 우주는 아주 작은 점이었다가, 빅뱅이란 사건 이후 팽창에 팽창을 거듭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보통 사람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지만, 우리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아주 빠른 속도로 팽창 중이다.. 이 또한 대충 설명이지만, 넓어진 공간만큼 물질들은 흩어져 무질서해져 간다. 심하게 어설프지만, 이것이 엔트로피가 계속해서 증가만 하는 이유다.

빅뱅 우주론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연히도 우리 우주는 계속해서 팽창하고, 엔트로피는 계속 증가하는 방향으로 되어있고,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국지적으로는 재미있는 패턴이 생겨날 수도 있지만, 결국은 모두 흩어져 무질서하게 되어 버린다. 흩날리는 먼지가 어느 순간 어느 위치에 딱 공 모양으로 모일 수는 있지만, 결국은 흩어져 무질서하게 된다. 엔트로피 법칙은 이 사실을 얘기한다.

시리아 팔미라 사원 잔해

 

한데 우리 우주에는 엔트로피 말고도, 유독 한 방향으로만 변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시간이다. 공간은 위아래, 앞뒤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지만, 시간은 오로지 미래로만 흐른다. 팽창만 하는 우주, 증가만 하는 엔트로피, 그리고 늙고 닳아가는 우리, 뭔가 연관성이 보이는가? 어쩌면 시간이란 따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우주의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정도를 측정하는 추상적 개념은 아닐까?

 

역행(Inversion)과 타임 패러독스

 

한데 누군가가 특정 대상에 대해서 이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발견했고, 그 힘을 활용하는 기술까지도 만들어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그가 총알이 박힌 벽에 그 기술을 적용시킨다. 그러면 나는, 벽에 박힌 총알은 다시 돌아와 총에 장전되고, 흩어진 벽의 파편들은 다시 뭉쳐 벽이 되는 마술 같은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내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은 미래로 시간이 흐르는데(순행), 유독 벽과 총알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모습(역행) 말이다. 엔트로피 역행이란 특정 대상에 대해서만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과 같아진다. 테넷은 이런 상상을, 아주 복잡한 플롯과 사건 구성으로 실현시킨 영화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간여행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인과율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타임 패러독스를 일으키게 된다. 테넷에서는 할아버지 패러독스라고 나오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내가 만약 과거로 돌아가 할아버지를 죽인다면, 그럼 나는? 할아버지가 없으니 나도 없다? 그럼 할아버지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럼 내가 태어나 할아버지를 죽인다? 이렇게 끝도 없이 모순이 맞물린다.

반대 방향 차

 

부트스트랩 패러독스

 

이 모순을 피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테넷은 과거와 미래를 서로 맞물리게 하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유형의 타임 패러독스를 흔히 부트스트랩 패러독스라고 하는데, 나무위키에 있는 예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셰익스피어 전집을 과거로 가져가, 셰익스피어 본인에게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그대로 베껴 글을 쓰고, 후손인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전집을 읽게 된다. 어떤가? 좀 이상하기는 해도 어쨌든 얘기는 연결된다.

테넷 포스터 대각 쌍

 

물론 이런 연결 구조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도대체 원래 소설은 누가 썼다는 걸까? 이처럼 부트스트랩 패러독스 구조가 모든 역설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서사 자체는 완결성을 갖게 된다. 거기다 자신의 꼬리를 물은 뱀처럼, 서로 맞물린 서사 구조가 묘한 느낌까지 줘서 매력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이런 특징 때문에 이 구조는, 터미네이터나 백 투 더 퓨처 등등 수많은 얘기들에서도 흔히 등장하곤 한다.

 

테넷은 대칭이다

 

흔한 테넷의 얘깃거리 중 하나가 앞으로도 거꾸로도 같은(쌍을 이루는) SATOR 마방진이다. 테넷은 기본적으로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영화고, 서사의 완결성을 위해 과거와 미래를 맞물린(쌍을 이루는) 부트스트랩 패러독스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따라서 테넷에서 등장하는 모든 주요 사건들은 SATOR 마방진처럼 순행과 역행 쌍을 가지고 대칭을 이룬다. 이를테면 한 장면에서는 같은 사람이 둘로 나와 순행과 역행을 하거나, 앞 장면의 행위가 뒷 장면의 행위와 쌍이 되는 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쌍은 자체적으로 완결성을 갖는 대칭이 된다.

양쪽 방의 대칭1
양쪽 방의 대칭2

 

이 완결성을 위한 또 하나의 장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정보의 통제다. 프리야(딤플 카파디아)도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Ignorance is our ammunition’이라 말한다. 무지가 우리의 무기라고.

 

정보를 통제함으로써, 미리 앎으로써 달라질 수 있다는 타임 패러독스를 방지하기도 하며, 누군가 사건에 끼어들어 복잡한 분기가 발생하는 것도 방지하게 된다. 문제는 등장인물 서로가 말을 아끼고 정보를 통제하는 바람에, 우리까지도 테넷을 보며 상황이나 이유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눈 크게 뜨고, 각 장면을 기억해, 수많은 조각들을 엮어야만 테넷의 전체 이야기가 연결될 수 있다.

무지가 우리의 무기

 

방구석 1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이해했다면, 테넷이란 게임의 기본 규칙은 이해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바둑이나 장기로 치자면 말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식으로 승패가 결정되는지 정도는 이해한 셈이다. 그럼 이제 느긋하지만 꼼꼼하게 영화를 본다면 모든 것들이 이해가 될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바둑이란 게임의 기본 규칙을 다 알았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을 속속들이 이해하며 즐길 수 있을까? 그 깊은 수읽기와 형세판단을 이해하며 감탄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놀란이란 감독이 그 모든 얘기들을 어떻게 꼬아서 표현했는지는, 기본 규칙을 응용한 전략과 전술의 차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고수의 판일수록 그 이해는 더욱 어렵다.

이세돌과 알파고 바둑

 

아마도 테넷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여태껏 엔트로피와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세상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머리도 그런 세상에 익숙한지라, 역행 세상의 사건을 보면 당황하고 멈춰버리게 된다. 이런 점에서도 역행 세상이 마구 뒤섞여 있는 테넷이란 영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산소 마스크 거꾸로

 

물론 어떤 이는 한두 번 만에도 대충 이해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몇 번을 봐도 이해 안 되는 사건들의 연속일 뿐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다음의 세 가지 방법을 추천해본다.

 

  1. 제대로 된 해석을 본다. 나무위키의 테넷 줄거리 항목을 추천한다.
  2. 다른 사람들, 가급적 뭘 좀 아는 사람들과 얘기해본다.
  3. 1번의 제대로 된 해석을, 영화와 함께 2번의 뭘 좀 아는 사람들과 얘기해본다.

 

미래에서 온 사토르 문서

 

아주 예전, 인터넷이나 위키 같은 것들이 없었던 시절에는 영화를 보고 모여 토론하는 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게 다 사라졌는데,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그냥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더 좋은 해석이 나오는데, 뭐 하러 잘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얘기를 하겠는가.

 

한데 묘하게도, 테넷이란 영화는 너무 어려워 인터넷 신공이 먹히질 않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럴 때는 옛날 사람들처럼 영화도 같이 보고 내용도 함께 토론해 보면 어떨까 싶다. 방구석 1열이던가? 딱 그런 프로그램인데 제법 재밌지 않은가? 어쩌면 그런 토론 모임이 영화를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놀란은 이것까지도 의도했던 걸까?

토론 모임

 

참고한 문서들

 

테넷 나무위키

엔트로피 위키백과

빅뱅 우주론 - 나무위키

타임 패러독스 - 나무위키

 

댓글0